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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그는 11세 때 이미 종교에 대해 회의했다. 수학의 확실성을 접하고 기뻐했으나 기하학의 공리가 증명할 수는 없고 다만 믿어야만 한다는 데 좌절했다. "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실성이나 불확실성을 가지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..."
러셀은 다방면에 업적을 남겼다.
그는 스승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<수학원리>를 썼고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<논리철학논고> 집필을 이끌었다. 대중적인 에세이스트로서도 명성을 떨쳤다.
"나는 머리가 가장 잘 움직일 때 수학을 했고, 조금 나빠지면서 철학을, 그리고 더 나빠져서는 역사와 사회 분야에 손을 댔다. 그리고 아주 나빠지기 전에 교육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."
러셀은 무정부주의자였다. 불가지론자였다. 회의론적 무신론자였다. 좌파였으나 소비에트 체제를 혐오했다.
- 동아일보. 2004. 2.1
- 새빨간 논리(이하운, 2012)에서 재인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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